<KISTI의 과학향기> 제2975호


컴퓨터과학자이자 SF 작가인 베너 빈지(Vernor Vinge)는 1993년 ‘특이점(singularity)’이란 개념을 처음 내놓았다.



이 개념은 기술의 발전이 점점 빨라져 결국엔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는 기계 지능이 탄생할 것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사실 특이점이란 아이디어는 ‘무어의 법칙’에 기초하고 있다. 인텔의 공동 창업자인 고든 무어가 제시한 이 법칙은 마이크로칩의 밀도가 2년 내지 18개월마다 2배씩 늘어난다는 법칙이다. 다시 말해 컴퓨터 처리속도가 일정 시기마다 배가 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진다는 의미다. 
 
당시 빈지 박사는 기계 지능의 폭발 시점, 즉 특이점이 도래할 시기를 2005년에서 2030년 사이로 예측했다. 그런데 최근 인공지능(AI)의 특이점이 도래하고 있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5월 세계 바둑 1위 커제와 대결을 벌여 3연승을 한 알파고다. 2016년 당시 이세돌 9단과 대국할 때만 해도 알파고는 인간의 기보로 학습했다. 그러나 커제와의 대국을 앞두고 알파고는 기보에 의지하지 않고 자율학습을 실시했다. 즉 인간의 기보에 없는 바둑의 수까지도 창조하는 단계로 발전한 것이다.
 
이에 대해 구글 측은 커제와의 바둑 대결을 통해 알파고가 직관과 창의성을 모두 갖췄음을 증명했다고 주장했다. 대국의 당사자인 커제 역시 알파고 바둑의 특징 중 하나로 창의력을 꼽으면서 앞으로 알파고를 바둑 스승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그림1. 알파고와의 대국에서 패배한 커제는 알파고의 창의력을 특징으로 꼽으며 알파고를 바둑 스승으로 삼겠다고 전했다.

 
창의력은 지식을 합성해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능력을 말한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능가하지 못할 것으로 꼽힌 가장 유력한 능력 중의 하나가 바로 창의력이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이제 창의력도 서서히 갖춰가고 있는 셈이다.
 
인공지능의 또 다른 단점을 꼽자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의사결정을 잘 내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다양하게 발생하는 불예측성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입력된 프로그램대로만 움직이는 컴퓨터는 이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런데 최근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도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인공지능 개발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 DARPA는 살아 있는 생명체의 뇌를 따라 만든 시스템으로 유기체가 어떻게 학습하는지 연구하고 있다. 이 연구가 성공할 경우 인공지능은 학습한 적 없으며 예측하지도 못한 불규칙한 상황에 직면해도 자기 나름대로의 대응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된다.
 
구글은 지난 5월 개최된 2017년 연례 개발자 컨퍼런스에서 인공지능을 또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소개했다. 인공지능으로 새로운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는 ‘오토ML’ 프로젝트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까지 인공지능의 신경망은 주로 과학자나 엔지니어 등 전문가 집단이 막대한 시간을 들여 구축해야 했다. 보통 강화학습이라고 불리는 이 과정은 시행착오, 보상 등을 통해 마치 강아지를 훈련시키는 것처럼 컴퓨터를 학습시킨다.
 
그런데 오토ML은 말 그대로 인공지능이 전문가 수준의 능력을 갖추게 될 때까지 스스로 반복학습을 실시한다. 따라서 오토ML이 개발되면 프로그래밍이나 알고리즘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도 누구나 원하는 결과만 지정해주면 인공지능이 자동으로 시스템을 설계해준다.
 
구글의 목표는 수십만명의 개발자가 특정한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신경망을 오토ML을 이용해 3~5년 이내에 개발하는 것이다. 성공할 경우 비전문가도 자신만의 아이디어로 특정 필요에 맞도록 맞춤형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어 모든 사람의 일상에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테크놀로지 매체인 ‘IEEE 스펙트럼’은 최근 발행한 특별판에서 인공지능의 특이점이 언제 도래할지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를 게재했다. 그에 따르면 구글 이사이자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은 2029년이면 인공지능이 인간의 뇌와 같은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2005년 레이 커즈와일은 그의 저서 ‘특이점이 온다’를 통해 기계가 인간의 능력을 앞지르는 시기를 2045년으로 예측했다. 불과 12년 만에 특이점의 시기를 16년이나 앞당긴 것이다. 다른 전문가들 역시 약간의 차이는 보였지만 인공지능의 특이점은 반드시 올 것이며 그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올 수 있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림2. 레이 커즈와일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는 시기를 2029년으로 앞당겼다.
 
물론 이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가진 과학자들도 있다. 현재 인간은 생물학적 지능의 원리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인간의 지능을 그대로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아직 등장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또한 특이점의 근거가 되는 무어의 법칙도 이제 한계에 이르고 있다. 트랜지스터의 크기가 원자의 크기에 도달해 곧 물리적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특이점에 대해 회의적인 과학자들은 이것이 특이점에 쉽게 도달할 수 없음을 알려주는 확실한 증거라고 본다.
 
한편 특이점의 등장을 걱정하기보다는 다양성(multiplicity)의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인공지능이 언제 인간을 능가하게 될 것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인공지능과 협력할 수 있는가를 고민할 때라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기계는 다양한 분야에서 인간을 넘어섰다. 그리고 지능분야에서도 인간을 능가할 수 있는 토대가 하나 둘 쌓여가고 있다. 이제 인간은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경기에서처럼 경쟁할 게 아니라 협력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그려야 할 때다.
 
 
글: 이성규 과학칼럼니스트 / 일러스트 :이명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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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I의 과학향기> 제2971호

 

 

 

 

  2017년 3월 미국에서 흥미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하루 만에 1000만원 정도의 작은 비용을 들여 15평짜리 주택을 짓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토록 빠른 속도와 저렴한 비용으로 집을 지을 수 있었던 비밀은 3D 프린터에 있다. 3D 프린터는 밑단부터 재료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미리 설계한 3차원 모형을 만드는 프린터를 말한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3D 프린터는 주로 플라스틱과 같은 고분자 물질을 이용해 작은 모형을 만든다. 이 프린터를 통해 인공 뼈를 만들어 수술할 수도 있고 생체 재료를 이용해 인공 장기를 만드는 방법도 연구 중이다. 

 

 

●3D 프린터로 빠르게 집을 짓는 비결은 ‘나노 기술’
 
3D 프린터의 크기를 키우고 들어가는 재료를 바꾼다면 집처럼 크고 거대한 물체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사실 3D 프린터로 건물을 짓는 것은 이번 사례가 아니더라도 이미 가능하다고 알려진 기술이다. 지난해 2월 유럽우주국에서는 달 표면에서 영구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문 빌리지’를 짓겠다고 발표하면서 건축 방법으로 3D 프린터를 선택했다. 건축용 3D 프린터를 달로 보낸 뒤 달의 토양을 이용해 건물을 짓겠다는 계획이다.

 

 

 

그림1. 유럽우주국에서 3D 프린터를 이용해 만드려고 계획한 달 기지 상상도 (출처: ESA)
 

 

3D 프린터로 집을 짓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집을 짓는 데 필요한 부품(예를 들면 벽돌)을 낱개로 인쇄해 조립하던가, 거대한 3D 프린터를 제작해 한 번에 집을 인쇄한다. 이때 핵심은 프린팅할 ‘재료’다. 3D 프린터는 한 겹씩 쌓아가며 인쇄하는 방식이므로 빨리 굳으면서도 거대한 건축물을 지탱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단단해야 한다. 이러한 소재를 만들기 위해서는 물질의 기본 구조를 나노 단위에서부터 분석해야 한다. 서명배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수석연구원 연구팀이 2014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네덜란드에서는 기존의 콘크리트에 섬유 소재를 넣어 보강하려는 연구를 시도하고 있다. 또 폴리프로필렌처럼 가벼우면서도 단단한 소재를 응용시키는 방법도 연구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건축물에 3D 프린팅 방식을 사용하기 위한 연구가 여러 면에서 진행되고 있다. 2013년에는 민간 기업 주도로 탄소 섬유를 이용해 3D 프린팅용 콘크리트를 개발하기도 했다. 
 

 

3D 프린팅 기술은 아직 미완의 기술이다. 거대 규모의 3D 프린터를 만드는 작업도 쉽지 않거니와 이 프린터에 넣을 건축 잉크를 개발하는 것도 숙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나라는 지난해부터 100m2급 콘크리트 건물을 3D 프린터로 한 번에 쌓을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 고려대, 목양종합건축사사무소 등 16개 기관이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5년간 130억 원을 투자할 예정이다. 
 

 

●나노 기술로 건물의 외형을 입힌다
 

 

3D 프린터로 뼈대를 만들었다면 본격적으로 집을 집답게 꾸며보자. 우선 콘크리트 외형이 그대로 남아 있을 외벽부터 손봐야 한다. 외벽에 단열재를 붙이고, 그 위에 벽돌을 덧대거나 페인트를 칠해 외형을 아름답게 만든다. 그러나 아무리 예쁘게 페인트를 칠해도 시간이 흐르며 먼지에 오염돼 지저분해지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이산화티타늄 나노입자를 이용하면 스스로 오염 물질을 분해해 깨끗한 외벽을 유지하도록 만들 수 있다. 

 

 

 

 

 

그림2. 민병권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청정에너지연구센터장팀이 개발한 형형색색 창호용 태양전지 (출처: KIST)
 

 

그 다음으로는 여러 가지 색을 띠는 유리창으로 건물 외형을 더 화려하게 만든다. 단순히 색을 입힌 색유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투명 태양전지’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민병권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청정에너지연구센터장 연구팀은 도영락 국민대 응용화학과 교수 연구팀과 공동으로 창문으로 사용할 수 있는 ‘창호용 태양전지’를 개발했다. 기존 태양 전지가 검고 불투명한 실리콘 기판을 사용해온 것과 달리 이 태양 전지는 구리, 인듐, 갈륨 등으로 구성된 박막 태양전지로 여기에 특정 파장만 반사하는 나노 구조를 가진 필름을 입혀 반사하는 빛을 제외한 나머지 빛을 모두 흡수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방법으로 빨간 빛만 반사하도록 만들면 빨간색 창문을, 파란 빛만 반사하게 만들면 파란 창문을 만들 수 있다. 
 

 

이 태양전지는 태양빛을 일부는 반사하고 일부는 흡수하기 때문에 햇빛이 들어오지 않도록 열차단 필름을 붙이지 않아도 된다. 건물 외형과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색의 유리창은 덤이다.  
 

 

●건물 구조, 외형에 이어 에너지 절약도 책임진다

 

거대한 건축물을 만드는 데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나노기술이 사용된다는 것이 어찌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자. 사람이 사는 건물은 끊임없이 에너지를 소모하지만 반대로 문을 열고 닫을 때 발생하는 힘처럼 더 이상 이용할 수 없을 것 같은 형태의 에너지가 발생되는 장소다. 그리고 이런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현재 연구되고 있다. 
 
나노하우스 03

 

그림3. 김연상 서울대 교수팀이 개발한 에너지 수확 소자에 물을 뿌리자 전기가 모이며

전구에 빛이 들어오는 모습 (출처: 전자부품연구원)

 

 

김연상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 연구팀은 물방울을 전기 에너지로 바꾸는 기술을 연구한다. 2014년에는 물방울이 전하를 가진 표면 위를 흐르면 전하가 변하는 성질을 이용해 전기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는 반도체인 에너지 수확소자를 개발했다. 연구에 따르면 40㎕(마이크로리터, 1㎕=10-6ℓ) 물 한 방울이 흐를 때 전력을 최대 0.42mW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대략 LED 한 개를 밝힐 수 있는 수준이다. 샤워할 때 물을 한 방울만 쓰는 것은 아니므로 일상 생활에서 일부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전기는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셈이다. 
 

 

마이크로리터 단위의 물방울에서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반도체는 당연하게 그보다 훨씬 정밀하게 만들어지며 제작 과정은 나노 단위로 제어된다. 집을 짓는 거대한 스케일과 물 한 방울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아주 작은 영역에서까지 나노기술은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지원 : 국가나노기술정책센터
글 : 오가희 칼럼니스트 / 일러스트 : 이명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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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I의 과학향기> 제2967호


2967멜라닌 최종240



유치원에 들어간 아이에게 새 크레파스를 사주고, 잃어버리지 않도록 크레파스에 이름표를 붙여주던 날이었다. 빨강, 주황, 노랑, 연두, 초록, 파랑처럼 발음마저도 귀여운 색색의 크레파스 속에 낯선 이름이 하나 보였다. ‘살구색’이라는 이름의 크레파스였다. 필자가 어릴 적엔 ‘살색’이라고 불렸던 바로 그 색이었다. 2000년대 초 “크레파스의 특정 색을 ‘살색’이라고 표현한 것은 인종차별”이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접수된 진정이 받아들여져 현재는 기술표준원에서 해당 색깔을 ‘살구색’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살색에서 살구색으로 글자 하나만 추가됐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어감이 확 달라져 훨씬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살색’은 저마다 다르다. 흰 눈처럼 창백한 하얀색부터 탐스러운 살구색, 잘 익은 알밤을 담은 갈색에서 밤하늘을 닮은 윤기 나는 검은색까지 매우 다양하다. 사람들의 피부색이 이토록 다양한 이유는 사람마다 피부에 존재하는 멜라닌 색소의 종류와 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멜라닌은 피부의 기저층에 존재하는 멜라닌세포(melanocyte)라는 세포에서 만들어지는 갈색 혹은 검은색의 고분자의 색소 물질이다. 멜라닌세포가 멜라닌을 적게 합성할수록 피부는 희고 창백해지는 반면 많이 합성할수록 짙어지고 검게 변한다. 
 

사람들마다 유전적으로 멜라닌세포의 활성이 다르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피부가 흰 사람과 검은 사람이 존재하지만, 한 개인의 일생을 살펴보면 멜라닌 세포의 활성이 늘 일정한 것은 아니다. 멜라닌의 합성은 외부 자극의 영향을 받아 조절되기 때문이다. 멜라닌의 활성을 증폭시키는 자극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자외선이다. 자외선은 생물의 DNA 손상을 가져오므로 생물체는 특히 자외선과 맞닿은 피부세포의 손상을 줄이고자 멜라닌을 만들어 자외선을 막는다. 다시 말해 멜라닌은 피부에 그늘막을 덮어 해로운 자외선이 피부 세포 깊숙이 파고들어 DNA를 난도질하는 것을 막아주는 일종의 보호 장치인 셈이다. 
 




그림1. 유럽인의 피부는 처음부터 희지 않았다. (출처: shutterstock)
 
지구의 대기권에는 오존층이 존재해 태양에서 유입되는 자외선의 거의 대부분을 막아내지만 오존층을 통과해 지상으로 유입되는 1~2%의 자외선만으로도 세포를 죽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따라서 지구상의 생물체들, 사실상 거의 모든 동물들은 멜라닌 색소를 갖고 있으며 인류의 조상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즉 지난 수백만 년간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피부색은 갈색 혹은 검은색이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인류의 피부에서 본격적으로 멜라닌이 적은 ‘흰 피부’가 나타난 것은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시기 이후, 그러니까 최근 1만 년 안쪽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난 2015년 인류학자들은 소위 ‘백인’들의 주요 거주지였던 유럽 전역에서 수집된 고대인 83명의 유전체를 분석해 고대 유럽인들의 모습을 유추하는 다국적 프로젝트를 수행한 바 있다. 이 프로젝트의 원래 목적은 지난 8000년 동안 유럽 지역에 살던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들이 가진 유전적 형질 중 환경적 특성에 영향을 받아 급속도로 퍼져 나간 유전적 형질이 있는지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유럽에 살던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들이 지니고 있던 유전자 중 특히 5가지가 훗날 이들 지역에 살게 되는 후손들에게 널리 퍼져 나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5개의 유전자 목록에는 유당을 분해하고 소화할 수 있는 유당분해유전자, 키를 커지게 하는 유전자군, 피부를 탈색시키는 유전자 2개(SLC24A5, SLC45A2), 그리고 금발과 흰 피부, 푸른 눈과 연관된 유전자 HERC2/OCA2가 이름을 올리고 있다. 
 

처음 아프리카의 초원에서 발생한 인류는 유라시아 전역에 흩어졌고 점차 고위도 지역까지 서식지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비타민 D 때문이었다. 비타민 D는 칼슘 대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물질인데 비타민 D가 부족하면 칼슘 대사가 제대로 일어나지 않아 각종 이상 증상이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이 골다공증과 구루병이며 이 밖에도 비타민 D의 부족으로 인해 당뇨, 근육통, 충치, 편두통, 우울증 및 기억감퇴증, 치매 증상 등이 나타날 수 있다. 각종 암의 발병율 역시 높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나 인체에서 칼슘이 가장 많이 축적돼야 하는 뼈의 이상은 결정적이다. 
 

비타민 D는 간, 우유 및 유제품, 버섯 등의 식품을 통해서 흡수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피부를 통해서 직접 만들어진다. 우리의 피부 세포는 자외선을 이용해 콜레스테롤을 변형시켜 비타민 D를 만드는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자외선은 비타민 D를 만드는 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DNA 파괴자이므로 우리의 몸은 멜라닌을 통해 자외선을 적절하게 걸러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일조량이 풍부한 저위도 지역에서는 멜라닌을 통해 자외선의 대부분을 걸러내도 비타민 D를 합성하는 데 필요한 양을 얻는 것은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인류가 고위도 지역까지 올라가기 시작하자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고위도 지역에는 일조량이 적어 자외선 조사량 자체가 적기 때문에 짙은 색의 피부가 걸러내는 미량의 자외선만으로는 충분한 양의 비타민 D를 합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지역에 사는 경우에는 탈색 유전자가 작동해 피부색을 옅게 만들고 자외선 필터링을 줄여주는 것이 생존해 유리한 형질이 됐을 것이다. 그렇게 피부가 흰 사람들이 북부 유럽에 등장하게 된 이 시기가 약 8000년 전경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흰 피부의 사람들은 북부 유럽에 한정돼 있으며 이베리아 반도와 유럽 중앙에 살던 사람들의 피부는 여전히 짙은 색이었다. 흰 피부는 일조량이 부족한 곳에서 비타민 D를 공급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을 뿐 그 자체가 유리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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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2. 유당분해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은 흰 피부를 가진 경우가 많았다. (출처: shutterstock)
 
흰 피부의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 계기에는 엉뚱하게도 우유와 관계가 있다. 원래 인간은 어른이 되면 우유 속에 든 유당을 분해하는 능력이 사라진다. 유당을 분해하는 유당분해유전자는 젖을 떼고 난 이후 활동을 정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 6000여 년 전부터 목축과 낙농을 주로 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유당분해유전자의 활성이 꺼지지 않는 돌연변이 종족들이 생겨나게 됐다.
 

이들은 우유를 소화시킬 수 있게 되면서 덤으로 우유 속에 풍부하게 든 칼슘과 비타민 D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시작했다. 특히나 목축과 낙농은 상대적으로 기온이 낮고 건조한 지역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흰 피부를 가진 경우가 많았다. 우유 속에 풍부한 칼슘과 비타민 D 덕분에 이들의 뼈가 제대로 성장하며 충실도가 높아졌고 이를 계기로 이들은 점차 세력권을 넓혀 나가게 됐다. 고대 유럽인들의 몸속에서 탈색유전자와 유당분해유전자, 키성장유전자군이 함께 선택된 건 이런 복합적이 환경과의 상호작용 때문이었다.

 
근대의 문화적 환경 속에서는 소위 ‘우월한 인자’로 간주됐던 유럽인의 흰 피부가 사실 햇빛이 부족한 지역에서 뼈가 굽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쳤던 고대인들의 유전적 궁여지책일 뿐이었다. 피부색으로 사람을 가르고 차별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부당한 행위인지를 알리는 것, 그것 역시도 과학의 역할인 것이다. 
 
 
글: 이은희 과학칼럼니스트 / 일러스트 : 이명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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