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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공학소식

[과학향기] 내 머릿속 트라우마, 공포기억만 찾아 지운다

<KISTI의 과학향기> 제2999호

 

 8월 초 개봉한 영화 ‘택시운전사’가 한 달 만에 관객 수 1000만 명을 돌파했다. 영화 속 주인공인 택시 운전사 김만섭은 광주에 내려갔다가 통금 시간 전에 돌아오면 10만 원을 준다는 말에 독일 기자 피터를 태우고 길을

나선다.

 
어렵사리 검문을 뚫고 들어선 광주에서 그는 계엄군에게 잔혹하게 학살당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목격한다. 광주는 완전히 고립됐다. 교통은 두절되고 시외전화까지 끊겼다. 하지만 시민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과 학생들에게 먹이고 택시 운전사들은 환자들을 병원에 후송한다. 그로부터 37년이 지났지만 광주 시민들에게 당시의 공포는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편도체 망가진 쥐, 고양이 무서워하지 않아
 
이런 후천적 공포는 위험한 상황에 노출됐을 때 그 상황이나 그때의 감정을 기억하며 겪게 된다. 세월호 참사에서 살아남은 학생들 가운데 지금도 사고가 난 4월 16일이 돌아올 때마다 기억의 상처가 덧나는 이가 있다.
 
이제 대학생이 된 단원고의 한 생존 학생은 화장실에 있던 친구가 무섭다고 나오지 않았다며 아직도 화장실

 가기를 꺼려한다. 이렇게 우리를 과거의 기억 속에 붙잡아 놓는 후천적 공포는 우리 몸 어디에 저장돼 있는 것일까.

 

 

사진 1. 편도체가 망가진 쥐는 고양이 앞에서 잡혀 먹힐 때까지 장난을 친다. 공포의 감정이 사라져 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출처 : Pixabay
 
공포의 발현과 기억을 관장하는 가장 중요한 기관이 양쪽 귀의 안쪽 대뇌 부위에 위치한 아몬드 모양의 ‘편도체’다. 불의의 사고로 편도체를 손상당한 환자는 감정, 특히 공포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반면 수술을 하기 위해 편도체 부위를 약한 전기로 자극하면 환자는 공포를 느낀다.
 
편도체가 망가진 쥐는 고양이 앞에서 잡혀 먹힐 때까지 장난을 친다. 공포의 감정이 사라져 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죽음과 같은 선천적인 공포를 느낄 때 편도체가 관여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편도체에 죽음의 공포가 각인되는 것인지, 대뇌의 다른 소기관에서 각인된 ‘죽음의 메시지’가 편도체를 활성화시켜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를 확인하려면 죽음의 공포를 재현하거나 측정할 수 있는 실험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 분야에서 큰 공헌을 세운 과학자는 미국 뉴욕대 조셉 르두 교수와 에모리대 마이크 데이비스 교수다. 이들의 가장 큰 연구 성과는

 기억의 저장소라고 알려진 시냅스에 선천적인 공포가 각인되고 평생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그렇다면 공포와 관련된 기억을 치유할 수 있을까.

 
신경세포 간 연결 약화시켜 기억 지운다
 
기억이란 두 신경세포 사이의 연결 부위인 시냅스에서 신호전달의 효율이 높고 신경세포 간의 결합이 강화된 상태를 말한다. 기억이 강화되면 신경전달물질을 수용하는 시냅스는 돌기처럼 볼록하게 솟아난다. 처음부터 신경세포가 돌기구조를 갖는 것은 아니고 기억이나 학습으로 시냅스가 활발히 만들어지면서 점차 돌기가 늘어나는 것이다.
 

 

사진 2. 두려움은 생존에 도움을 주지만 과도할 경우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게 할 수도 있다. 출처 : Pixabay
 
만약 신경전달물질 분비가 원활하지 못하면 시냅스의 연결에 문제가 생겨 기억력이 떨어지거나 언어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 이를 활용해 공포기억 저장에 관여하는 신경세포들을 찾아 그 연결을 약화시킨다면 특정 기억을 없애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최근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UC 리버사이드) 조준형 교수와 김웅빈 연구원이 실험용 쥐의 공포기억을 저장하는 신경세포 간 연결을 약화시키면 공포기억이 희미해진다는 내용을 국제학술지 ‘뉴런(Neuron)’ 8월 18일 자에 발표했다.
 
사람은 생존에 위협이 되는 사건을 경험할 때 이와 관련된 상황이나 자극에 두려움을 느끼도록 진화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뱀을 보면 기겁한다. 먼 옛날 인류의 조상들에게 뱀과 맞닥뜨린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뱀을 보면 무조건 도망가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생존에 유리했을 것이다.
 
두려움은 생존에 도움을 주지만 과도할 경우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게 할 수도 있다. 연구진은 이를 치료할 수 있는 실마리를 풀고자 공포기억에 관여하는 신경세포들과 저장 경로를 찾기로 했다.
 
먼저 쥐에게 소리를 들려주고 이 소리를 들려줄 때마다 약한 전기충격을 줬다. 다음 날 이 쥐는 전기충격 없이 소리만 들어도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않았다. 전날 소리와 전기충격을 함께 받았기 때문에 소리만 듣고도 전기충격을 받은 듯한 공포심을 느낀 것이다.
 
또 이 쥐는 특정 청각 신경세포와 공포기억을 담당하는 뇌 부위인 편도체 사이의 연결이 강해져 있었다. 이는 소리를 듣는 신경세포와 공포기억이 저장된 곳 사이에 튼튼한 ‘신호전달 통로’가 놓여졌다는 뜻이다.
 
이후 연구진이 ‘광유전학(optogenetics)’ 기술을 이용해 청각 신경세포와 편도체 사이의 연결을 약화시키자

 소리를 들었을 때 쥐의 공포감도 약해졌다. 특정 소리와 연결된 공포기억이 지워졌기 때문이다.

 
공포기억 없애는 연구가 필요한 이유
 
이제까지 공포기억을 지우는 연구는 일반인에게 오해를 불러일으켜 왔다. 공포를 일으킨 상황에 대한 기억을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공포를 느끼는 감정에 대한 기억을 삭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가령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는 기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당시 느꼈던 공포기억만을 지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준형 교수팀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다른 기억을 유지한 채 불필요한 공포기억만 없앨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과거 군부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죽음은 그냥 지나간 추억은 아닐 것이다. 또한 살아남은 이들의 상처가 치유될 수 없을 정도로 커져서는 안 될 것이다. 공포기억을 없애는 연구가 절실히 필요한 이유다.
 
글 : 서금영 과학칼럼니스트 / 일러스트: 이명헌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