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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공학소식

[과학향기] 범인의 지문 밝히는 나노입자들

<KISTI의 과학향기> 제3007호

 

 

 

범죄현장은 범인의 지문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현장의 지문이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되는 경우는 10~20% 정도에 불과하다. 증거로서 가치를 가질 만큼 선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현장에서 발견된 지문의 정확도를 높이려는 연구가 전 세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지문은 피부에 있는 세 가지 내분비선, 즉 에크린(eccrine)선, 피지선, 아포크린(apocrine)선에서 나오는 분비물과 땀이 섞여 흔적을 남긴다. 분비물의 대부분은 물이지만 염화물과 암모니아 같은 무기물과 당, 요소, 아미노산 등 유기물도 포함돼 있다. 수사기관은 현장에 남겨진 지문을 육안으로 확인하기 위해 잔여물을 잘 흡착할 수 있는 물질이나 이 잔여물과 반응하는 시약을 활용한다. 남겨진 지문을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서는 지문과 반응하는 물질의 선정이 매우 중요하다.
 
나노 입자, 지문의 분비물과 화학적 결합 생성해
 
눈을 크게 뜨고 지문을 살펴보자. 볼록 튀어나온 마루가 있고 안으로 쏙 들어가 있는 골이 있다.
 
마루와 마루 사이의 거리는 1mm도 채 되지 않는다. 정교하게 지문을 채취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작은 입자가 필요하다. 지문에 흡착하는 입자의 지름이 1mm 수준만 돼도 마루 2~3개를 덮을 정도이기 때문에 지문의 고유한 패턴을 읽어낼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지문을 채취하는 데 나노 입자를 활용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으며 어떤 나노 입자가 지문에 잘 흡착하는지를 알아내기 위한 연구가 세계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림 1. 스위스 로잔대 세바스티앙 모렛 교수팀은 화학반응을 이용해 나노입자를 지문에 흡착시켜, 잘 보이지 않는 지문을 채취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pH를 조절해 지문 분비물의 전기적 상태를 조절했고, 음으로 대전된 나노 입자와의 인력에 따라 지문이 채취되는 정도가 달라졌다. 출처: University of Lausanne
 
스위스 로잔대 세바스티앙 모렛 교수 연구팀은 지문에 나노 입자를 흡착시키기 위해 전기적인 인력을 이용하기보다는 화학 반응을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를 ‘나노테크놀로지’ 2014년 10월 1일 자에 발표했다.
 
기존에는 나노 입자가 정전기의 성질을 띠고 지문에 흡착한다는 가설이 우세했다. 그러나 모렛 교수는 이를 뒤집고 화학작용을 이용하면 더 정교하게 지문을 추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험적으로 증명했다. 연구팀은 용액의 pH를 조절해 지문 분비물의 전기적 상태를 조절한 뒤 음으로 대전된 나노 입자와의 인력에 따라 지문이 채취되는 정도를 비교했다. 그 결과 산성도가 높은 pH 3 이하에서는 지문이 육안으로 확인됐지만 산성도가 낮거나 중성인 pH 5~7 사이에서는 확인이 불가능했다.
 
반면 화학 반응을 이용한 실험에서는 강한 화학적 결합을 통해 정교하게 지문을 채취할 수 있었다. 연구팀은 지문이 묻어 있는 알루미늄 포일을 이산화규소(SiO2) 나노 입자 수용액에 담갔다. 이산화규소 나노 입자에는 카르복실기(carboxyl)를 가진 화합물이 코팅돼 있었다. 즉 나노 입자와 지문 분비물 간의 반응이 일어나도록 한 것이다. 그 결과 지문 분비물에 포함된 아민(amine) 화합물과 나노 표면의 카르복실기 사이에 화학적 결합이 생겼다.
 
모렛 교수는 ‘사이언스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나노 입자와 지문 간에 화학적인 상관관계를 이용하면, 지문 이외에 다른 흔적들은 지우고 지문의 흔적만을 보여줄 수 있어 정확도가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1. 김종만 한양대 화학공학과 교수팀이 개발한 특수 필름은 물이 닿은 부분만 빨간색으로 변한다. 이를 이용해 손가락에 있는 땀구멍 패턴을 추출할 수 있다. 출처: 한양대
 
국내에서는 한양대 연구팀이 나노 크기의 땀구멍을 이용해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잠재지문’을 검출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손가락에는 머리카락 굵기의 50분의 1 크기의 작은 땀구멍들이 분포해 있다. 사람마다 고유한 땀구멍 분포 패턴이 있어 지문을 추출하기 어려울 때 땀구멍을 이용하면 개인을 식별할 수 있다. 하지만 땀구멍의 크기가 워낙 작아 이 패턴을 추출해내는 것이 큰 과제였다. 한양대 화학공학과 김종만 교수 연구팀은 물과 반응해 색이 변하는 폴리다이아세틸렌(PolyDiAcetylene, PDA)을 이용한 특수 필름을 개발했다. 손에서 나오는 땀이 필름에 닿으면 파란색 필름이 빨간색으로 변하며 땀구멍 패턴이 필름 위에 드러난다. 김 교수는 “입자를 이용한 방식보다 지문이 망가질 위험이 적다”고 말했다.
 
이미 지워져 버린 지문도 살려내는 만능 나노 기술
 
나날이 지문 채취의 정확도가 높아지고는 있지만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지문의 흔적은 시간이 지나면 점점 사라지기 때문에 현장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나노 기술을 이용해 일부 지문을 영구적으로 남길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됐다.

 

 

사진2. 지문의 마루와 마루 사이에는 수 많은 땀구멍들이 있다. 사람마다 고유한 땀구멍 패턴을 가지고 있어, 이를 추출할 수 있다면 또 다른 개인 식별 인자로 사용할 수 있다. 출처: 한양대
 
영국 레스터대 알렉스 고다르드 전문 연구원은 영국 노샘프턴셔 경찰청과 함께 화학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금속 표면에서 지문을 검출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총이나 칼, 총탄처럼 여러 사건, 사고에서 결정적 증거가 되는 물건은 대부분 금속 재질이기 때문에 새로운 방법은 범죄 수사의 정확성을 한층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연구팀은 나노 크기의 물질까지 확인할 수 있는 ‘원자간력 현미경(AFM)’을 이용했다. 지문이 남아 있는 황동 시료를 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금속의 표면에 묻어 있던 지문의 흔적을 닦아내도 땀과 분비물이 나노 수준에서는 여전히 남아 있어서 지문의 형태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와 함께 연구진은 지
문이 오랫동안 남을 수 있는 환경 조건도 확인해, 온도 및 습도에 따라 금속 표면에 영구적인 지문 흔적이 남을 수도 있음을 알아냈다.
 
나노 과학수사 기술로 지문 채취의 정확도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범죄현장에 남겨진 아주 작은 증거로도 범인을 특정할 수 있게 됐다. 나노 기술로 범죄의 억울한 피해자들이 줄어들기를 기대한다.
 
글: 최지원 동아사이언스 기자 / 일러스트: 이명헌 작가